500년전의 불굴의 기개
500 년전의 불굴(不屈)의 기개(氣槪)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은 함창의 양적리에 출생하여 청년시절에 병졸이였으나 과거를 보아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지냈고 문하생이 많았으며 저서로는 허백당시집등 다수가 있다.
경상북도에서는 그의 저서와 유적을 '유형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 홍귀달은 남이(南怡)와 함께 이시애난(李施愛亂)을 평정한
후에 승승장구하여 대사헌을 지낸 인물이나 임금일지라도
'대간(大諫)에굽혀서 정치 업적이 뛰어 난다면 잠깐의 굽힘이 영원히 펴는 것'이라
하여 왕(王)이 대노해도 역린(逆鱗)을 마다하지 않았다.
-홍귀달(洪貴達)은 성종때 폐비윤씨 사건으로 투옥 당하기도 하고
무오사화(戊午史禍)때 10여건에 달하는 왕의 난정을 간(諫)하다가 좌천,그의 손녀를 세자빈(世子嬪)으로 예궐(詣闕)하라는 왕명을 거역했고 경원(慶源)으로 유배중 교살(1504,絞殺)당했다.
— 홍귀달(洪貴達,1438~1504)은 함양(咸陽)의 군졸이였으나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 평생에 남을 거스르는 빛을 가진 적이 없으며,
남이 자기를 헐뜯음을 들어도 성내지 않으니, 그의 아량에
감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 홍귀달은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금의 큰 덕이며 후일의 권여(權輿)이고 성(聖)이 되고 덕과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이 아울러 나타날 것이니 간언을 거역하지 말라고 하여 간쟁(諫諍)의 언로(言路)로 인하여 왕과 충돌도 마다않고 직언했다.
— 홍귀달의 간언은 역린의 반기(叛起)로 인지되여 귀양갈때 홍귀달은 집안 식구와 작별하면서 일갈, 하늘의 뜻(天意)이다.
일개 병졸로 재상까지 되었으니 부귀는 본래 내 소유가 아니었다며 단천(端川)에서 교살될 때도 얼굴빛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받아드렸다.
—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도 불굴(不屈)의 기개를 갖는 것이 늠늠함이고 남의 비위나 맞추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 존엄일진데
기개(氣槪)가 굳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음의 호탕불기(豪宕不羈)나 척당불기(倜戃不羈)가 공동체에서 필요불가결함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