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옛날 애기
밤이 이미 깊어서 賀客(하객)들은 흩으져 가고
만뢰(萬瀨)가 구적(俱寂)했다.
신랑도 신부와 더불어 화촉동방(華燭洞房)에 들어서
백년가약(百年佳約)의 꿈이 이루어 지려 했다.
이때 별안간 신부가 복통을 일으켜 어찌할 줄 모르더니
옥동자(玉童子)를 분만( 分娩) 했다.
웬만한 사람이면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그 집을 뛰쳐 나왔을 뿐이며
신부는 일생을 햇빛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부의 가족들까지 얼굴을 들고 세상 사람을 대할수 없어
문을 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趙씨의 태도는 너무나 침착했다.
갓난 아기의 삼을 가른 뒤 포대기 하나를 꺼내서 싸가지고
남모르게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근처 안전한 굴뚝밑에 두고
담을 넘어 다시 신방(新房)으로 돌아와
배가 아프다고 방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장모가 사위의 비명소리를 듣고 와서
무슨약을 지으면 좋겠냐고 밖에서 물으니
미역국과 밥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부랴부랴 계집종과 서둘러 밥상을 신방에 들여 보내니
신부인들 어찌 받겠냐 마는
신랑이 강권하니 마지 못해 들면서 눈물을 흘리더라.
새벽에 일어난 신랑이 짐짓 산보하는양 뒷곁에 나가
갓난애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불쌍한 생명이니 데려다 키워야겠다며
하녀에게 포대기를 들려서 집으로 돌아 왔다.
그때로부터 17년 지난 어느 날 조씨의 부인이
고아(孤兒)로 자라고 있는 본래 제 자식을 불러 앞에 앉혔다.
자기가 시집 오기전에 이웃집 총각과의 불륜관계이며
그 후의 일들을 소상히 털어 놓았더니
마침내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춰 버린게 아닌가.
그로부터 20년 후 세월이 흘러가 조씨가 늙어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여러 상제들을 비롯해서 온 집안이 슬픔에 잠기고
초종 치르는 일이 예법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장례식을 며칠 앞둔 어느날 목탁소리가 들리며
중년의 승려가 찿아 왔는데 예사롭지 않는 조상을 하고 나더니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 근방 바닷가에는 무인도가 하나 있는데
그 섬 안에는 백자천손(百子千孫)에다 대대로 정승판서가 나올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기에다 선친(先親)의 유해(遺骸)를 모시라고 권유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운구(運軀)할 배까지 준비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상주는 그 중의 외모(外貌)로 보아서 속승(俗僧)이 아닌 도(道)가 높은 분으로 보인데다
명당자리라기에 의논 한후 승낙하고 말았다.
장례날이 되었다.
바닷가에는 이미 배가 두척이 등대 되었고 관은 앞에 싣고 중이 옆에 모시었고
상제들은 뒷배에 올라 출발 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앞 배가 쏜살같이 달아나 도저히 딸아갈 수 없어
낙심하며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은 누구이겠는가 ?
바로 조씨의 부인이 첫날밤에 낳은 아이로 17년간 거둔 그 아이였던 것이었다.
그 아이는 출가하여 중이되어 도를 닦고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익혀
전국을 편답(遍踏)하여 제일가는 명당에다 모심으로 은혜에 보답했던 것이었다.
그 뒤 趙氏의 후손은 참으로 번창하여 우리나라에서 망족(望族)이 되었다.
趙氏는 조선 말기의까지의 당당한 세도(勢道) 집안이었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