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남이장군

충무공 남이장군 야사(忠武公南怡將軍野史)

노신사노신사 2007. 6. 14. 10:13

 

충무공(忠武公) 남이(南怡)장군 야사(野史)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慶北 英陽郡 立巖面 蓮塘里)입구 선바위 와 앞에 펼처저 있는 충무공(忠武公) 남이장군(南怡將軍)의 전설(傳說)이 전해지고 있는 남이 포(南怡 浦)라는 넓은 강변이 있다.
옛날 선바위 안쪽 연당리(蓮塘里) 석백(石白) (속칭 돌백리) 석백지(石白池)가에 아룡(阿龍)과 자룡(子龍)이라는 형제가 살았다.


이 아룡과 자룡 형제는 원래 석백지(石白池) 지룡(池龍)의 소생으로 지용(智勇)이 뛰어나 일찍부터 흉계를 품어 역모를 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원래 아룡과 자룡은 신용(神勇)이 있어 누구라도 감당할 자가없어 저들이 성세를 떨친지 오래도록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 소식이 조정에까지 들어가자 조정에서는 논의(論議) 끝에 무용(武勇)이 절륜(絶倫)한 남이 장군(南怡 將軍)에게 토벌 령을 내렸다.
남이(南怡) 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서 아룡과 자룡을 토벌할 새, 이들을 지금의 선바위 앞 강변으로 유인하여 반란군(叛亂軍)과 대결하여 싸우게 되었다.


이에 양군 주시속에 남이 장군과 아룡.자룡이 출전하여 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승패가 없었으나 차차 이합 삼합으로 들어가자 양편의 검술은 묘경이어서 보는 사람들도 점차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다, 싸움이 더욱 치열하여 지자 양편 장군은 점차 몸을 날려 공중으로 떠올라 가면서 검기(劍技)를 다툴 새 섬섬(閃閃)한 검광만이 하늘에 비쳐 번쩍일 뿐 점차 사람은 아득하여 보이지 않고 공중에는 장시간 칼 소리만 쟁쟁하게 울려올 뿐이었다, 바라보는 양군의 군사들은 몸에 땀이 배었다, 차차 칼 소리가 멎어지자 아득히 공중을 바라보니 아룡과 자룡의 목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관군 측에서는 크게 함성이 일어나고 환성이 터졌다.


이에 개선한 남이 장군은 늠름히 공중에서 내려오는 길에 선바위 꼭대기에 검을 휘둘러 칼끝으로 자기의 초상을 새기고 내려와서 나머지 반란군(叛亂軍)들에게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양군이 대전하던 이 계포(溪蒲)를 후인들은 남이 포(南怡 浦)라 하며 지금도 선바위 꼭대기를 처다 보면 칼 자욱이 뚜렷이 보인다고 한다.


지금은 영양군에서 선바위 위락및 휴양지구로 개발하여 호텔, 특산물판매장, 고추, 분재, 수석 전시관이 있고 선바위건너편 절벽 밑에 남이정사(八角亭)가 있으며 이 남이정사를 관람하기 위해 건너가는 석문교(石門橋)다리에 분수와 조명을 설치하여 영양군의 관광(觀光)명소(名所)로 알려 저 있다.






남이 장군이 아룡과 자룡이형제와 싸워 이기고 내려 오면서 칼로 내리처 칼자욱이 있다는 전설이있는
경북 영양군 입암면에 있는 선바위 입니다.
건너편에 남이정사와 남이포관광지가 있지요.

 




경북 영양군 입암면에 있는 남이포의 남이 정사 사진입니다
이 남이정사 건너편에 남이 장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 관광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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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바위와 남이포의 남이(南怡)장군이 전설(傳說)속 인물이 아닌 실존(實存) 인물이므로 남이(南怡)장군의 행적(行蹟)과 야사(野史)를 적어보고 저 한다.

공(公)의 姓은 南이요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휘(諱)는 이(怡)로, 조선 태조 조(太祖 朝) 개국 일등공신(開國 一等功臣) 의정부(議政府) 영의정 (領議政)이신 충경공(忠景公) 휘(諱) 남재(南在)의 현손(玄孫)이며, 태종(太宗)의 부마(駙馬 사위)인 의산위(宜山尉) 시(諡) 소간공(昭簡公)이신 휘(諱) 휘(暉)의 장손(長孫)이며 부사(府使) 휘(諱) 빈공(?公)의 장자(長子)로 세종 25년(世宗二十五年 1443)에 출생 하셨으니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장손(長孫)이오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징손(外曾孫)으로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7세때 무과(武科)에 급제 25세때 길주(吉州)에 나아가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워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이어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건주위(建州尉 만주땅)의 여진족(女眞族) 이만주(李滿洲)를 정벌할 때 또한 으뜸공을 세우고 돌아와 적개공신(敵愾功臣)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하고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시고 이듬해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르셨다.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한지 얼마 않 되어 대궐 안에서 숙직하든 어느 날 밤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에고 새것이 깔릴 징조라고 한 말을 엿 듯고 평소에 공을 시기하든 유자광(柳子光)이 모함하여 장군을 모반(謀叛)한다 하고

백두산시(白頭山詩)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이오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라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랴 라는 시(詩)는 명장(名將)으로서의 웅지(雄志)를 엿보여주는 유명한 시?중 미평국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처 그 증거라 하여 국문(鞠問)을 받게 됨에 공이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활과 말로 일삼더니 졸지에 변경에 일이 급하여 나라에 바치니 신이 본래의 뜻이요.

 

 신에게 두마음이 있었다면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었지 돌아와 오늘을 기다렸겠나이까? 하고 5일을 매 맞고 단근질해 몸에 살이 없고 뻐가 부러�으나 끓어앉아 몸을 헤트리지 않았다. 누구하고 했느냐 함에 강순(康純, 領議政)을 부릅떠 보며 강순과 같이 했나이다 하니 강순이 영상(領相)으로 왕(王)을 모시고 옆에 있다가 끌려 나가 고문을 당하매 강순이 돌아보고 군(君)과는 아무 원구가 없는데 나를 끓어 넣느냐고 하니 장군이 웃으며 ?공이 영상이 되어 나의 무죄를 구하지 못하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니 강순이 묵묵하였다 .

강순(康純)이 나이 80이라 매를 못 이겨 남이(南怡)의 말 데로라 하고 장군과 같이 죽음을 당하였다. (예종원년, 1468년)


세상에 전하기를 장군이 처음 잡혔을 때 유자광이 그 힘을 염려하여 쇠사슬로 얽어매고 나무로 울타리 하여 갔는데 다 가서 장군이 몸을 떨처 일어나니 쇠사슬이 토막이 나고 곧 일어나 지붕에 올라가 소리 높여 나의 구부림이 하늘이 보고 계시다, 내 형(刑)을 받지 아니하면 누구를 어찌 하랴 내 이렇게 하는 것은 젊은이로 하여금 나의 힘이 죽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함이라.

군명(君命)으로 죽는 것이나 한스러운 것은 대장부가 자광이 같은 조무래기에게 죽는 것이라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자광이 머리를 움츠리고 손가락을 깨물며 떨었다 한다.

 

장군이 내려와 국문을 받음에 눈을 감고 혀를 깨물며 매를 맞기를 큰 나무로 만든 사람같이 하여 통성(痛聲)을 내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임 하였다.


산소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대장등(華城郡飛鳳面南田里大將嶝)에 계신데 자손이 없어 돌보는 사람이 없더니 6대방손 약천 구만공(藥泉九萬公)이 수묘(修墓)하였고 1968년 족후손(族後孫) 정사(廷四)씨 영우(永祐)씨 들이 정성껏 치산을 하고 1971년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어 화성군수(華城郡守)가 묘비를 세우게 되었으며, 사당은 소간묘(昭簡廟 의산위공 사당)에 함께 모시어 아우 되시는 군수 초공(郡守 ?公)의 자손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배위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좌의정(左議政) 익평공(翼平公) 람(覽)의 따님과 고성이씨(固城李氏) 서윤(庶尹) 호연(浩然)의 따님이시다.


순조(純祖) 18년(1818년)에 관작(官爵)이 복구 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구봉서원(龜峰書院)에 배향 되었다.

공에 대한 일화(逸話)가 많으니,
6세 때 마당에서 놀고 있노라니 일가 집 계집종들이 나와 기둥 옆에 앉아 있는 것을 기둥을 들어 치마폭에 꽂으니 종들이 가려고 하나 일어날 수 없서 괴이하게 여기니 모부인이 웃으며 아이 장난이라 하고 꾸짖고 기둥을 들어 주게 하였다 한다,


13세 때에는 호남(湖南)에서 가져올 물건이 있는데 하인이 사납게도 호한(豪悍 사납고 거센자)들이 말을 듣지 않거늘 스스로 가보니 노비들이 바꾸어 치려다 그 위엄을 보고 감히 영(令)을 어기지 못하였으며 면포(綿布) 수백 필을 거두어 싣고 돌아올 새 날이 저물어 인가가 없는데서 길을 잃고 있노라니 숲 사이에서 한 아이가 나타나 멀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있으니 따라오라 하거늘 공이 6,7리 따라갔더니 산을 돌아 골짝에 큰 집이 있는데 관청과 같고 당상에는 늙은 괴수가 앉았는데 예쁜 계집이 곁에 섰고 많은 사람이 손님 접대하기를 구면(舊面)같이 하되 몹시 수상하더니 동자로 하여금 별채로 데리고 가 자려고할 때 소녀가 나와 시중 하더니 밤이 깊어짐에 계집이 귀에 대고 하는 말이 나는 양가집 딸로 이곳에 강제로 끌려 왔는데 이집 주인은 큰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나가는 상인을 끌어들여 죽이고 재산을 뺐는 무리로 낭군의 하인은 독주를 먹여 광속에 가두고 짐은 다 곳간에 넣었으며 객이 잠드는 것을 기다려 목을 조르거나 술을 퍼 먹이거나 독초나 비상을 태워 쏘이게 하고 소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낭군을 뵈오니 인걸(人傑)같아 이를 고하니 살길을 도모하라 하거늘 공이 냉수를 많이 떠오게 하고 옷을 찢어 신들 미를 하고 귀와 입을 막고 물을 버리고 자는체하니 소녀가 나간 뒤에 연기가 스며들어 숨이 막힐 지경이나 공은 끝내 무사하였으며 날이 밝을 무렵 한 도적이 죽었나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공이 발로 걷어차고 또 들어오는 자를 걷어차 연거푸 세 놈을 죽이니 적이 소리를 지름에 두목이 놀래어 일어나거늘 공이 뛰어들어 두목을 죽이니 도적 무리가 크게 놀래 담을 뛰어 넘거늘 주먹으로 수십 명을 때려잡으니 도적 무리가 꼼짝 못하였다, 이에 공이 당상에 올라가 그 무리를 다 불러놓고 못된 놈은 죽이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곳간의 물건을 일일이 적어 관청에 바치고 자기 짐만 챙기어 돌아가니 이일이 나라 안에 소문나 모두들 남 장군이라 하였다 한다.


또 15세 때에는 길에서 노닐다가 한 계집이 이고 가는 박물 짐 위에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괴상히 여겨 따라 가본즉 한 대가 집으로 들어 가드니 별안간 곡성(哭聲)이 남에 사연을 물어 본즉 작은 따님이 죽었다 하거늘 내 들어가 보면 살릴 수 있으리라 하고 들어가 보니 분두귀(粉頭鬼)가 낭자(娘子) 가슴을 타고 있다가 공(公)을 보고 달아나 낭자가 살아나고 공이 나옴에 낭자가 다시 죽고 공이 다시 들어가면 또 살아나는 지라 공이 그 방물 짐이 무었 이냐고 물으니 홍시(紅?)인데 낭자가 먼저 먹고 숨이 막혀 죽었다 하니 공이 사기(邪氣)를 다스리고 약을 주어 구하니 이는 좌의정(左議政) 권람(權擥)의 4녀라. 권공이 그일을 기이하게 여겨 정혼(定婚)코져 이를 점치니 이 사람이 반드시 요절(夭折)하리라 하고 그 딸의 명을 점치니 복자(卜者)말하되 그 명은 극히 짧고 또 아들이 없겠으나 복은 누리되 화는 보지 않겠으니 사위를 삼음이 옳다 하여 이에 따랐는데 과연 공보다 수년 먼저 돌아 가셨다.


권람(權擥)이 타고 다니는 말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걷어 채이고 타지 못하나 공은 이 말을 타고 박연(朴淵)에 갔다 반나절에 돌아왔는데 말의 땀이 장(漿) 흐르듯 하였으며, 공이 권람 에게 말하기를 이 말은 옹(翁)은 타되 약하여 전쟁에는 쓰지 못 하겠다 하며 후에 양성(陽城) 길에서 소금 장사를 만나 마른 적마(赤馬)를 비싼 값에 사들이니 환난(患難)이 있을 때 마다 그 완급(緩急)에 따라 한번 울고 두 번 울고 세 번 울어 깨닫게 하였다 한다.


17세에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는데 그 때 호랑이가 성안에 뛰어들어 사람을 해치나 도리가 없는지라 왕(王)이 걱정하여 이를 잡을 자가 누구냐 하니 남이(南怡)가 십여 세에 큰 도적을 죽였으며 날래고 활을 잘 쏘니 이 사람이면 가 하리다 하니 왕께서 허락하시고 공에게 명하시니 공이 적마(赤馬)를 타고 종남(終南)밖 기슭에 숨어있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한 대 쏘니 뒤 넓적다리에 맞았으나 소리만 지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또 한 대 허리를 맞추니 호랑이의 울음은 골을 진동하며 곧 바로 공에게 대어드는 것을 말을 달려 피하며 돌아서서 한 대를 쏘니 화살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 꼬리로 꿰 �으니 호랑이는 더욱 노하여 크게 울부짖는 것을 공이 다시 긴 창으로 찔러 죽이니 삼군(三軍)이 넋을 잃고 보는자 놀라 물러났으며 왕은 크게 기특하게 여겨 특명으로 초탁(超擢 남을 뛰어 넘어 뽑아 씀) 하였다 한다.


길주(吉州) 어떤 파보(坡堡)를 지나는데 뚝 서쪽 돌벼랑이 수십 길인데 그 속에 요마(妖魔)가 있어 사람을 해쳐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한다 하거늘 장군이 철추(鐵推)로 쳐부수니 다시는 요마가 그쳤다 하여 이 파보를 장군파(將軍坡)라 한다고 한다.


장군께서 얼마나 명인(名人) 이었으면 근세(近世)에 관광회사(觀光會社)에서 경기도 가평에 있는 남이(南怡) 섬 이라는 섬 이름을 기화로 가짜 묘(墓)와 비석(碑石)을 꾸며놓고 관광선전(觀光宣傳)을 하였는지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후손(後孫)되는 남씨들조차 장군의 산소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찾아가 정성껏 성묘 까지 하였다 하니 악랄한 영업수단에 분노를 느낀다.


비문(碑文)을 읽어 보면 ?남이 장군(南怡 將軍)과의 인연이 있는 곳으로 전해 오기에 옛 영웅을 사모하고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라고 하였지 이 고장이 장군이 산소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그 교묘한 방법이 더욱 밉기만 하다.


그런가 하면 용산구 용문동(龍山區 龍門洞)에는 남이 장군사(南怡將軍祠)라는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매년 춘추(春秋)로 제사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장군(將軍)께서 이시애난(李施愛亂) 출정(出征) 당시 이곳에서 300명의 모병(募兵)을 하였고 한강변(漢江邊) 새남터에서 처형(處刑)되신 사실로 인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온 지방민(地方民)이 정성껏 제사를 받들며 무병건강 소원성취 신수재수(無病健康 所願成就 身數財數)를 빌게 되었고 이 일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자연 민속신앙(民俗信仰)으로 굳혀져 1973년에는 서울시 민속문화재(民俗文化財)로 등록 되었으며 제향 때에는 각기관(各機關)에서까지 동원(動員)된다고 하며 사우보존위원회(祠宇保存委員會)가 있어 장군(將軍)의 출생지(出生地)라고 전해오는 남이(南怡)터를 비롯하여 남이섬 그리고 화성군 묘소(華城郡 墓所)에 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분들 말에 의하면 가평군 외서면 대성리(加平郡 外西面 大成里)에 장군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남이터 가 있는데 뒷산에 장군(將軍) 바위라는 부채 모양으로된 전후면(前後面)이 손바닥처럼 평평한 선바위가 있더라는 이야기었다. 그리고 그곳에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수십대(數十代) 살아왔고 지금도 집성을 이루고 있다하니 장군(將軍)의 모당(母堂)이 홍씨(洪氏)인 점으로 보아 장군(將軍)의 출생지(出生地)임이 틀림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가하면 1972년 5월4일자 모 신문(新聞) 동리산책란(洞里散策欄)에 서울 종로구 연건동 126이 장군(將軍)의 태생지로 장군출생(將軍出生)후 맞은편 낙산(?山:이화뒷동산)에 풀이 나지 않았는데 이는 낙산(?山)의 정기를 장군(將軍)이 한 몸에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전설(傳說)이 있는가 하면 서울의대부속병원(서울醫大附屬病院)자리 고개를 ?도깨비고개?

 또는 ?도깝재?라 불렀는데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죽어 이곳에 버려진 장군의 심복들이 밤이면 도깨비로 둔갑해 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장군이 처형된 연건동일대(蓮建洞一帶)에 물이 마르기 시작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의 집터에 사당을 짓고 명복을 빌자 하룻밤 사이에 동네 한가운데 (蓮建洞 六六)에 우물이 생겨 주민들은 이 우물을 ?남이(南怡) 우물?이라 불렀고, 이 우물은 도로공사때 매몰(埋沒)되고 그 자리에 펌프가 설치되었다는 기사(記事)가 실려 있으니 과연 어느곳이 장군(將軍)의 출생지(出生地)인지 그 진가를 가릴길 없고, 이외에도 ?남이(南怡) 고개?등 남이(南怡) 두자가 붙은 곳이 여러 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하여간 얼마나 명인(名人)이었으면 이런 전설(傳說)이 많이 나돌았을까 새삼 장군을 흠모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편 서울시 용산구청 주관으로 매년 11월 초순 용산구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및 이 일대에서 남이장군 사당재를 10여 일간 큰 행사를 열어 남이장군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공(公)에게는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 �으니 마땅히 후세 사람들은 충무공(忠武公)이라 불러야 옳은데 모든 사람들이 남이장군(南怡將軍)이라고 해야 알아들으니 안타까운 마음 이를데 없으며, 여러 책자나 남이섬에 있는 안내판등에 남이(南怡)를 태종(太宗)의 외손자(外孫子)라고 적은 곳이 많이 있는데, 남이(南怡)는 태종의 넷쩨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장손(長孫)이므로 태종(太宗)의 외징손(外曾孫)이 되심을 다시한번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