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미군기지의 사실(史實)들.
-.국권 상실과 국토를 초토화하고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고 경제력이나 무력으로 해당 나라를 압박하여 강대국의 세력을 넓히려는 패권주의(覇權主義)와 식민주의의 본산(本山)이 된 국치(國恥)의 상징인 용산의 미군기지가 정말로 반환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군은 땅굴을 파고 대치하는 방식이였다.
예를 든다면 이오지마(硫黃島/유황도)의 땅굴은 미해병대의 손실이 큰고전였다.
경기도 미군 某부대는 引繼鐵線(인계철선)과 알박기 방식이나 대체로 미군의 작전은 전진과 퇴각를 쉽게하도록 주둔한다.
— 引繼鐵線(인계철선)의 가치를 남기고 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옮기는 것은 부대 운영상이나 퇴각의 작전상 유리한 면과 북한군의 포격 사정거리에서 비켜가는 잇점도 있을 것이지만 한강의 기적에 미군이 떠 밀려 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 용산의 미군기지의 그 터는 몽골군이 주둔했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한 일본군의 행패가 있었고 임오군란때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점령을 했고 해방 이후 부터는 미군사령부가 주둔해 왔다.
— 청나라 군사가 용산에 주둔할때는 마누라 있는 청나라의 군관 원세개(袁世凱)에게 양반집 규수를 하녀를 붙여서 첩(妾)으로 보내는 아첨을 나라가 떨었는데 원세계는 하녀까지 첩을 삼고 중국의 풍습대로 나이 많은 하녀가 2 째첩이고 규수는 3째 첩이 되였다.
— 일본군이 용산에 들어 올때는 인천에서 용산까지 전봇대를 세우고 전화선을 깔았으니 그것이 한국의 유선전화의 시초이며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이 매일 아침마다 전화로 고종의 능(陵)에 전화로 '애이고~ ' '애이고~ ' 곡(哭)을 했다고 한다.
— 점령이 목적인 일본군이 인천에서 용산기지 까지의 단축거리로 하여 철로를 놓고 그것이 오늘의 경인선이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는 용산에서 경인선 기차를 타고 인천에서 일본군함에 옮겨타고 이역만리 일본에 있는 황자 이은(李垠)을 만나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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